<해위 선생 5주기 설교>

 

굽히지 않는 신앙

에스더서  3:1-6

 

오늘 해위 선생님 5주기를 맞이하면서 저는 구약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모르드개를 생각하였습니다.

모르드개는 페르시아에 포로된 유대인으로 왕궁을 지키는 문지기였습니다. 그는 비록 포로민이었지만 언제나 민족적인 긍지를, 특히 선민으로서의 긍지를 결코 잃지 아니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사촌 동생인 에스더가 왕후가 되었지만, 그를 통하여 출세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자기 직분을 만족하게 생각하며 충실하게 문지기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왕을 살해하려던 자들의 음모를 사전에 발견하여 처단케 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말렉 사람인 하만이 왕의 신임을 얻어 총리대신이 되고, 그가 궁중을 드나들 때마다 모든 신하들이 그에게 꿇어 절하도록 왕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만은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신하들이 그에게 매일같이 충고를 하였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 그러다가 큰 코 다칠지 모르니 순순히 머리 숙여 절하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막무가내로 결코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만이 아말렉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말렉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숙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하만에게 유대인인 모르드개가 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총리대신이라 하더라도 그의 민족적 자존심 때문에 그에게 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즉각 하만에게 보고되었고, 모르드개가 유대인인 것을 안 하만은 모르드개 한 사람만이 아닌 유대인 전체를 없애버리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모르드개는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융통성 없는 우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민족적 감정이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자기가 처한 현실을 보아 융통성 있게 처신해야 했을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어쩌면 현실을 모르는 지나친 이상주의자였는지도 모릅니다. 사실상 그가 융통성 없게 행동하므로 자기 민족 전체에게 무서운 화를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아달월 십삼일에 전국의 유대인을 죽이라는 특별 명령이 공포되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모르드개를 융통성이 없다고 원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가 이런 사실을 알고도, 그는 자기 한 사람이라도 이 민족적 긍지를 지키지 못한다면 사실상 유대 민족은 존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이미 생명을 내걸고 끝까지 이 민족적 자긍심을 지키려고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우에 할 수 있는 일은 타협하는 일이요, 아부하는 것이요, 자기 신념을 굽히고 현실을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모르드개가 이렇게 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아마도 수문장으로 출세를 하였을지 모르지만, 유대인의 민족적 자긍심은 여지없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해위 선생님을 제가 모르드개에 비유하는 것은, 어떤 압력에도 결코 굽히지 아니하고 자기의 신념을, 혹은 민족적 자긍심을 지켜나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회고록 <외로운 선택의 나날>의 마지막 장인 10장 "유신독재와의 투쟁기록"에 보면, 민청학련 사건을 비롯하여 국민투표 거부 운동, 3·1 민주구국 선언 소위 명동사건 등 79년 유신 정권이 끝날 때까지 굽힐 줄 모르는 민주화 투쟁이 계속되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1974년 선생님은 민청학련 사건과 연루되었다는 죄명으로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동길 교수, 김찬국 교수와 함께 기소되어 징역 15년을 구형 받으셨을 때, 최후 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어떤 법에 의해서 징역 15년의 구형을 받았는지 모르겠으나 15년형 뿐만이 아니라 사형장에 끌려가는 한이 있어도 민주주의를 성취시켜야 하겠다는 결심은 변할 수 없다. 오직 이 나라에 진정한 반공과 함께 인권이 존중되고 자유가 보장되는 참된 민주주의가 성취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남은 여생을 그러한 신념으로 살고 투쟁할 것이다"

모르드개가 유대인의 민족적 긍지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하만에게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은 것처럼, 선생님은 오직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일념으로 유신 정권과 맞서 투쟁하신 것입니다. 선생님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이 민족의 수문장 역할을 기꺼이 감당하신 것입니다. 역사의 도둑들이 함부로 날 뛸 때 이들을 감시하고 쫓아내기 위하여 그 시대의 문지기 노릇을 충실히 하신 것입니다. 이런 그의 심경을 그는 다음과 같이 적어 놓으셨습니다.

"이 나라는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이 나라 국민은 언제까지 억압과 억울함을 항변하지 못하고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착잡한 심경을 억누르지 못한 나는 진심으로 내 한몸 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독재와 불의와 불법과 맞서 투쟁할 결심을 더욱 굳히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80을 바라보는 노구이지만, 조금도 굽힘 없이 바르고 참된 의지를 꺾으려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그 결심대로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있은 "3·1 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하시고 직접 참석하셨다가 노구에도 불구하고 시위대 맨 앞에 서서 행진해 나가셨던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선생님은 또다시 10년이 구형되었고, 징역 8년의 실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은 멈추어지지 않고 오히려 가열되어 점차 투쟁의 열기를 더하여 갔던 것입니다. 유신 정권은 말기적 증세를 보이면서 온갖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여,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을 비롯하여 YH 사건,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의원의 의원직 제명 등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에 항의하는 부산과 마산의 항의 데모로 부마사태가 발생하였고, 이것이 결국은 유신 정권의 종말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을 우리가 다 잘 아는 바입니다.

전직 대통령으로써 두 차례의 재판을 받는 수모를 당하시기까지 하시면서 결코 굽히지 않은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불의와 불법에 대하여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가 마침내 17년간의 장기 집권을 한 군사독재정권을 물러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실상 편히 쉬어야 할 고령에 격렬한 민주화 투쟁 선봉에 서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그분의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으며, 그 정의감이 얼마나 확실하였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투쟁을 노령에서 감당하신 그 기백과 용기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높은 사형대를 만들었고, 모든 유대인들을 동시에 몰살시키려고 음모를 꾸몄으나 모르드개의 굽히지 않는 신앙과 의지가 모든 유대인들을 감동시켰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그 역사가 역전되어 하만이 자기가 만든 사형대에서 처형되고, 유대인들은 극적으로 구출되었던 것입니다.

일제때 언론계에서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시던 신채호 선생님은 세수를 하실 때에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의 옷소매는 물에 흥건히 젖었습니다. 한번은 소설가 이광수씨가 이 광경을 보고 이상히 여겨 물었습니다.

"아니 자네는 그렇게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세수를 하나?"

그러자 신선생이 대답하기를 "나는 죽어도 허리를 안 굽힐뿐 더러 고개도 못 숙이겠네. 비록 일본놈들한테 뿐만 아니라 세수를 할 때도 말이야" 라고 하였습니다.

불의와 불법이 난무하는 어려운 시대에 이런 대쪽같은 의지를 가진 용기 있는 투사들을 통하여 새로운 정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아직 이 땅의 통일과 민주화의 길이 멀고 많은 과제들이 남아 있지만, 해위 선생님과 같은 굽힐 줄 모르는 정의의 투사들을 통하여 마침내 이루어지고 말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가신지 벌써 5년이 지났습니다. 그 어른이 바라시던 문민정부가 들어서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우리가 해결해 가야할 민주화의 과제는 산적해 있습니다. 오늘 그 어른의 자취를 다시 돌이켜 보면서 그 열정과 신념과 의지를 본받아 결코 불의와 불법을 용납하지 않는 정의로운 투쟁을 계속해 가야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개혁은 정치적인 쇼를 통해서 이룩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인 교육의 개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볼 때,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이상과 열정을 지닌 그리고 불굴의 의지를 지닌 많은 일군들이 배출되어야 할 것입니다. 존경할만한 인물들이 없는 때에 거인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우뚝 서 계신 선생님은 진정 우리가 흠모해야할 이 시대의 어른이심에 틀림없습니다. 그 어른의 자취를 길이 기억하므로 이 땅에 통일이 이루어지고 참된 민주화가 실현된 새 역사가 성취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